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15일 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76명 추가되어 일간 신규 환자 수가 두 자리 수로 대폭 줄었다. 지난달 21일 이후 23일 만이다. 신규 완치자가 신규 확진자보다 많은 흐름도 이날까지 사흘 연속 이어졌다. 대구와 경북 지역 신규 확진자 수(각각 41명, 4명)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등 신천지 예배 관련 집단감염 여파가 안정화되는 모습이다.
반면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감염이 가파르게 확산하고 있다. 코로나19는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3,045명(사망 60명)이 감염됐다고 미국 언론들이 15일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감염자와 잇따라 접촉한 사실이 확인돼 관련 검사를 받아야 했다. 뉴욕타임스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관리들과 대학 전문가들이 비공개로 논의한 결과를 입수해 보도한 데 따르면, 미국이 코로나19를 방관할 경우 감염자는 1억6000만~2억1400만명, 사망자는 20만~170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예측이다.
미국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 전역에서 공립학교는 물론 다중이 이용하는 모든 시설의 폐쇄가 잇따르고 있다. 각종 종교와 스포츠 행사들도 올스톱 상태다. CNN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 거의 마비됐다”고 하면서 미국 전역이 ‘락다운(lock down·폐쇄)’ 상태에 빠졌다고 전했다. 생필품 사재기 바람이 불어 대형 마트와 식료품점은 사람들이 몰려와 물, 휴지, 통조림, 빵 등을 쓸어갔고 텅 빈 진열대만 덩그러니 남았다고 한다.
유럽에서도 이탈리아에 이어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이 확진자가 급증하자 비상사태 선포, 음식점 영업 금지, 휴교령 등으로 확산 방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코로나19 피해가 큰 이탈리아의 바이러스 확산세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4일 기준으로 이탈리아의 누적 확진자 수는 21,157명, 누적 사망자는 1,441명이다. 특히 누적 사망자 수는 중국 사망자 3,199명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상승세가 가파르다.
스페인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부인도 감염됐고 정부 내각의 장관 2명도 이미 확진자로 판명됐다. (확진자 7,753명, 사망 288명)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를 포함해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동제한 봉쇄 조처에 들어갔다. 에이피(AP) 통신은 스페인 당국이 차분한 대응을 호소했지만 일부 도심에서 시민들이 슈퍼마켓에 몰려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고, “여행객들로 늘 북적거리던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거리들도 확연히 조용해졌다”고 전했다.
프랑스(확진 4,500여명, 사망 91명) 정부도 봉쇄를 강화하고 나섰다. 에펠탑·루브르박물관은 물론 프랑스 전역의 카페·식당·영화관·나이트클럽은 모두 문을 닫도록 했다. 식료품점·약국·은행·담배가게만 휴업에서 제외된다. 각급 학교도 문을 닫고 기업에는 재택근무를 권고했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유럽의 동쪽 밀라노에서 서쪽 마드리드까지 광장과 거리가 텅 비었다고 전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유럽이 코로나19의 ‘진원’이 됐다고 우려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유럽이 이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의 진원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유럽에서) 중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계를 합친 것보다 많은 확진 사례와 사망자가 보고되고 있다”며 “중국에서 이 전염병이 절정일 때보다 더 많은 사례가 현재 매일 보고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코로나19 감염자에 대한 완치율이 80%를 넘어선 중국은 안정된 국면이다. 15일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의 집계 결과, 전날 하루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20명이다. 이 가운데 4명은 우한에서 나왔으며, 나머지 16명은 외국에서 중국으로 입국한 뒤 확진 판정을 받은 역유입 사례다. 중국에서 코로나19 역유입 확진자는 총 111명에 달한다.
국내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이전보다 진정된 시점에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공포증(phobia·포비아)이다. 코로나19 감염이 국내에서 확산되던 초기에 중국공포증의 조장·유포 양상이 심각했었다. ‘짱깨’, ‘중국인은 바이러스’ 등 자극적인 중국인 혐오 표현이 넘쳤고, ‘중국인 출입금지’를 내건 가게가 등장하기도 했다. 수구 언론은 중국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었고, 구태 정치인과 일부 종교인들은 ‘중국인 입국금지’를 외치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이제 미국과 유럽이 코로나19 팬데믹의 진원으로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공포증이나 유럽혐오증을 조장·유포하는 가짜뉴스나 선동 발언은 찾기 어렵다. ‘미국인 출입금지’를 내걸었다는 소문도, ‘유럽인 입국금지’를 외치는 집회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특정 국가나 특정 인종에 대해 공포증을 조장하고 증오와 혐오의 적대감을 유포하면서 낙인과 배제를 일삼는 것은 반인륜적인 증오범죄이다.
주목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증오와 적대의 감정 표현이 엄연히 존재하는 반면에 미국(유럽)과 미국인(유럽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여론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중국과 미국(유럽)에 대한 태도와 감정이 사뭇 다르고 매우 상반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돌아보면 단지 코로나19 사태에서만 그런 양상이 나타난 게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폄하하고 무시하면서도 미국과 유럽의 서양인에 대해서는 동경하고 호감을 표시하는 현상이 흔하다. 극단적인 부류는 서양인의 우월성을 무한히 칭송하며 동양인을 근거 없이 비하하기도 한다. 유자격 유능 강사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적이 아니고 아시아 출신이라서 학부모들이 영어강습을 피한다는 뉴스, 반대로 미국적의 백인이라서 강사라고 썼더니 무자격자에 미국에서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인터폴 수배를 받던 파렴치한 성범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서 충격에 빠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직도 박근혜를 추종하는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드는 데서도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 안에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원래 서양의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동양 문화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년~2003년)가 『오리엔탈리즘』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였다. 사이드는, 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으로 형성된 동양에 대한 적대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의 서양 예술 및 학술 전통을 지칭하는 용어로 오리엔탈리즘을 재정의했다.
사이드는 서양이 만든 동양에 관한 담론은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한다고 해석한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무능하며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보다 두뇌나 신체 면에서 열등하다고 단정한다. 쇠퇴하고 비참한 동양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자기들이 동양을 구원했다고, 자신들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한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화적 헤게모니의 일환이라는 것이 사이드의 주장이다.
문제는 우리 의식에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와 자기 비하의 콤플렉스가 다름 아닌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이다. 오죽하면 미국 하원의원의 ‘카더라’ 한마디에 한국 코로나19 진단키트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번지는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사실에 대한 확인도, 맥락에 대한 파악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미국발이라면 그저 진실인양 떠드는 형국이니,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코로나19 방역에서 한국이 훌륭한 모범 사례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감염병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일부 서구사대주의자들이 오매불망 추종해 마지않는 미국과 유럽의 정부당국은 물론이고 관련 전문가와 언론의 평가 또한 다르지 않다. 미국과 유럽 나라들이 우리나라에서 시행한 방역 정책을 따라 배우고 도입하기도 한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자기 비하와 자기 부정의 사대주의 노예로 얽매인 채 누워서 침 뱉고 있을 것인가. (2020년 3월 1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