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마켓팅과 이분법의 함정

- 4·15 총선은 한일전인가? -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의 최배근 공동대표는 “이번 총선은 국내 정치로 위장된 한일전”이라고 주장했다. 27일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하여 한 말이다. 그는 “작년 일본의 경제 도발 때 제가 이것은 국내(한국) 정치세력을 이용해 문재인 정권을 좌초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며 “총선에서 원내 1당과 국회의장을 빼앗기면 문재인 정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파산 상태로 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4·15 총선이 한일전인가? ‘총선이 한일전’이라는 구호는 21대 총선을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으로 설정하여 ‘토착왜구 청산’을 겨냥한 것일 터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등 일본의 경제 공격이 시작된 지난해 7월, 당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정부가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겠느냐?”라며 일본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여 ‘토착왜구’라고 지탄을 받은 바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8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안보 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되고 협정을 지속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종료를 선언했다. 지소미아는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협정으로 민감한 군사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협정이다. 그런데 일본이 먼저 한국을 ‘안보상 믿을 수 없는 국가’라면서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훼손한 상황에서 지소미아를 유지할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종료일 11월 23일을 나흘 앞두고, 문 대통령은 19일 생방송으로 중계된 ‘국민이 묻는다’에서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군사정보는 공유하자고 한다면 모순되는 태도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지소미아는 예정대로 종료되는 거냐?’는 질의에 대해 “일본의 태도 변화가 있지 않은 한 재고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입장이고, 현재까지도 그렇다.”고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지소미아 종료 시점을 불과 6시간 남기고 22일 긴급 발표를 통하여 종료 통보를 철회했다. 지소미아는 1년간 유효하며, 어느 한 쪽 당사자가 다른 쪽 당사자에게 이 협정을 종료하려는 의사를 서면 통보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1년씩 연장된다. (지소미아 제21조) 이로써 지소미아는 2020년 11월 23일 0시까지 자동적으로 1년 연장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문 대통령은 지소미아의 연장 발표 직후, 청와대 앞에서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 중이던 황교안 대표에게 사람을 보내 “지소미아가 잘 정리됐다.”, “이렇게 단식까지 하시며 추운데 고생해줘서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다.”며 단식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황교안과 ‘토착왜구’ 일당은 환호작약했고, 지소미아 종료를 둘러싼 소동은 이렇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게 끝나버렸다. 지소미아 문제에서도 최악과 차악의 적대적 공존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시민당 최배근 공동대표가 상기시킨 한일전, 곧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전개된 한일전의 내막이 이러하다. 4·15 총선이 한일전이고,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이 타당한가? 자유한국당의 후신 미래통합당이 친일의 잔당으로 ‘토착왜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반일인가? 아베 내각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카드로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결말은 한낱 정치적 연출(반일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친일 대 반일의 대립 구도가 아니다. 최악과 차악의 적대적 공존일 뿐이다.

한일전 프레임은 허구다. 문제는 진보운동의 일각에서 이런 프레임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총선에 출마한 진보정당의 어떤 후보는 ‘총선은 한일전!’이라고 쓴 현수막을 자기 선거사무소 벽면에 내걸었다. ‘친일파 없는 국회 만들기’ 운동을 펼쳐온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5일 부산 동구 초량동 항일거리에서 결과보고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총선이 한일전이라는 구호를 가슴 깊이 새긴 기간”이라며 “앞으로 국민을 믿고 친일 없는 국회를 만드는 활동에 계속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친일파 청산이 진보운동의 과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21대 총선에서 진보운동이 앞세워야 할 의제인가?

작년 “아베 정부가 경제 도발로 문재인 정권을 좌초시키려고 한다.”라고 한일전을 주장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총선을 앞두고 말을 바꿔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 “총선에서 원내 1당과 국회의장을 빼앗기면 문재인 정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탄핵의 위기로 내몰릴 것이다.”라는 위기론이다. 전형적인 ‘공포 마켓팅’ 전략이다.

과연 공포의 실체가 있는가? 아베 정권이 문재인 정부를 좌초시킬만한 힘이 있으며, 한국 정부는 그렇게 허약하단 말인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아베의 경제 제재는 우리 경제에 타격을 입히기는커녕 되레 제 발등만 찍고 말았다. 마찬가지다.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원내 1당이 될 거라고? 코로나 19라는 국가적 재난을 선거에 악용하려던 미래통합당은 역풍을 맞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가 올라가고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정당 지지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은 ‘최소 지역구 130석’이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물론 선거란 변수가 많고 개표 때까지 가봐야 안다. 결과를 단정적으로 예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하지만 ‘공포 마켓팅’에 속아서 2중대 놀음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은지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최악에 대한 공포를 내세워 차악에 대한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다.

이분법에서 선택의 이유는 기쁨이 아니라 공포이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해주는 선택지는 이미 차악으로 정해져 있다. 1명만 뽑는 소선거구제와 1등만이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 선거에서 차선 또는 최선에 대한 투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는 이유로 선택지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최악과 차악의 두 선택지만 유효하고 차선과 최선의 선택지는 배제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는 위협적이다. 사람은 공포를 느끼는 순간 얼어붙는다. 공포에 사로잡히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고 정상적 활동이 어려워진다. 공포는 위축을 야기하며, 위축은 의혹과 불신,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믿음이 흔들리고 피동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면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체성을 상실하면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 채 2중대의 수동적인 역할에 자족하게 된다.

비례대표 투표용지의 위 칸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작전과 ‘꼼수’를 부렸던 여야의 위성정당들이 결국 소수정당을 제치고 둘째 칸(미래한국당)과 셋째 칸(더불어시민당)을 차지하게 됐다.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이 위 칸을 차지한 것은 거대 양당이 막판까지 치졸한 꼼수 경쟁을 벌인 결과이다. 탈당과 ‘셀프 제명’, 그리고 ‘의원 꿔주기’ 경쟁이 난무한 것은 역대 선거사상 최악의 추태로 기록될 것이다.

4월 2일부터 21대 총선의 선거전이 본격 개시된다. 진보운동의 정체성과 진보정치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슬라보예 지젝(1949.3.21.~ )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위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골라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항하여 싸울지를 결정한 후에 대중적인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2020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