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미국이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을 제치고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세계 1위 국가가 됐다. 미국 50개주 중 최대 발병지는 뉴욕주이다. 뉴욕주 감염률은 인구 1000명당 1명꼴로 다른 주의 5배를 넘어서고, 뉴욕주 확진자 수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보다 많아졌다. 뉴욕주는 확진자 폭증에 의료 인력, 장비와 시설 부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뉴욕 명소 센트럴파크 등에는 환자 수용을 위한 임시 병원이 마련됐고, 영안실 부족에 냉동 트럭이 동원됐다.

미 당국은 뉴욕주 외에도 뉴저지주, 캘리포니아주 등 전국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4월 말까지 연장했다. 백악관 태스크포스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돼도 10만명에서 24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 모델을 내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과 관련, 미국이 ‘치명적 시기’, ‘참혹한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1~2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와 대등할 수 있다고 비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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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의술을 자랑한다는 미국이 이런 참혹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 근본 원인은 의료체계의 문제다. 낮은 의료보험 가입률과 허약한 보장성,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의료비용이라는 고질적 문제가 코로나19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민낯을 드러냈다. 미 정부가 지난달 긴급지원책을 내놓기 전까지 미국에서 코로나19 검사 비용은 보험이 있으면 약 1500달러(약 186만원), 없으면 3700달러(약 457만원)였다. 응급실을 방문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3만5000달러(약 4300만원)의 청구서를 받았다는 사례도 언론에 보도됐다.

2018년 기준으로 미국 인구의 8.5%(약 2750만명)가 의료보험이 없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의사와 단 몇 분 동안 상담하는 데만 수백달러(수십만원)를 내야 한다. 기본 보험에 가입돼 있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선 의료보험을 민간회사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환자 본인 부담금이 상당하다. 영국 <가디언>은 시카고대 등의 2018년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미국인의 44%는 아프거나 부상을 당해도 의사를 찾지 않는다고 전했다. 의료보험이 없거나 있어도 본인 부담금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파도 참고 견뎌야 하는 약 1000만명(2017년 기준)의 불법 이민자는 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미 정부의 코로나19 검사 비용 지원책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도 안 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의심 증상이 있어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천문학적인 병원비 부담 때문에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국의 현행 의료체계에서는 코로나19에 노출되어도 수천만 명이 병원도 찾지 못한 채 죽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1~2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와 비교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나 빈말이 아니다.

지난 1일 뉴욕 케네디 공항에 러시아 군용기가 착륙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치솟는데 의료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비상이 걸리자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긴급지원을 호소했고, 러시아에서 군용기로 인공호흡기와 마스크를 실어 보낸 것이다. 이뿐 아니다. 지금 미국은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로부터 마스크 “해적질” 국가라고 지탄받고 있다. 이들 나라가 중국 공장에서 수입하려고 한 마스크 수백만장을 미국 업자들이 많은 웃돈을 현찰로 지불하고 도중에 가로챘다는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에 손을 벌리고, 중국산 마스크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

땅에 떨어진 미국의 체면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위대한 미국’은 없다. 2016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트럼프 후보가 내세웠던 구호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였고, 그의 2020년 대선 슬로건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이다. 하지만 일극 패권국가 미국의 지도력은 코로나19 사태로 초라한 민낯을 드러내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위기 시대에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현대판 해적질’을 서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 치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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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경제 충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3월 비농업 일자리는 70만1000명이 감소, 실업률이 4.4%로 치솟았다. 미국에서 월간 신규 일자리 수가 줄어든 것은 무려 113개월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치적으로 자랑하던 ‘완전 고용’ 실업률(3.5%)도 깨졌다. 미국 3월 넷째 주(22~28일)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665만 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갱신했다. 종전 최고 기록은 66만5000건(2009년 3월)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불과 2주 만에 약 10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총 228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는데, 4월 한 달 만에 그만큼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 경제 분석 기관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는 미국의 실업률이 이미 12.5%대로 치솟은 상태라고 추정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최고치인 10%(2009년 10월)를 벌써 넘어섰다는 분석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실업률 15%를 예상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최고치다. (1933년 미국 연간 실업률 25%) 실업 대란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2분기 실업률이 10%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2021년 말까지 9% 선에 머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미국 정부가 연신 현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경기는 계속 가라앉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3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IMF 역사상 이처럼 세계 경제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번 위기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며 코로나19의 경제적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신세계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미국의 이상’을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기회와 가능성이다.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품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열려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바라보고 미국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다. 미국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24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자, 급기야 미국은 ‘허망한 죽음의 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였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3일 코로나19가 세계 질서를 영원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19로 세계 질서가 바뀔 것”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종식되더라도, 세계는 이전과 결코 같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질서를 주도했던 대서양동맹은 사실상 와해됐다. 유럽에서 코로나가 퍼지자 미국이 제일 먼저 취한 방역조치가 유럽인 입국금지였다. 영국 <가디언>은 “서양이란 브랜드의 아우라가 바랬다. 코로나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힘과 영향력을 급속히 전환시킬 것”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의 지도력은 추락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누구도 더 이상 미국을 세계의 지도 국가로 보지 않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드는 기괴한 무리도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사라질까? (2020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