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자본주의와 의료 영리화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2005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풍 중 하나로 기록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2500여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미국인들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재난 자체보다도 미국 정부의 무능력과 자본의 탐욕이었다. 현재의 트럼프 정부뿐 아니라 그때도 미국 정부는 재난 대응에서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자본은 재난을 돈벌이의 탐욕을 추구할 절호의 기회로 이용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교 대부분이 폐허가 됐지만, 한편으론 교육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끔찍한 재난의 참사가 공립학교를 민영화하는 기회로 악용되었다. 카트리나 이전 123개였던 뉴올리언스 공립학교는 4개로 줄었다. 신자유주의 성향의 미국기업연구소는 “루이지애나의 교육 개혁가들이 수년 동안 못했던 걸 카트리나가 단 하루 만에 해냈다.”며 감격했다.

캐나다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클라인은 저서 <쇼크 독트린>에서 재난을 틈타 벌어지는 자본의 횡포를 재난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재난으로 위기가 닥치고 공포와 무질서가 덮치면 재난을 핑계로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쇼크 요법의 정책이 관철된다는 것이다. 거대한 재난이 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리고, 시민들이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자본과 국가는 주도면밀하게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거나 규제완화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킨다. 재난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졌던 임시적 조치가 이후에 제도로 흡수되어 상시적인 것으로 된다.

1997년 외환위기와 비정규직 제도는 우리가 경험한 쇼크 독트린의 사례다.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로 쇼크를 받은 한국은 국가 부도라는 재난의 공포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며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국가 부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IMF구조조정프로그램을 쇼크 독트린으로 받아들인다.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명분으로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이 도입‧시행되고, 이후 비정규직 확대, 구조조정과 불안정 고용이 일상화되었다.

재난을 이용하여 시장을 확대하고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재난 자본주의의 결과는 무엇일까. 사회의 양극화가 한층 심화되고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됨으로써 사회가 재난에 훨씬 더 취약해진다. 외환위기 이후의 재난 자본주의가 한국 사회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지난주 칼럼에서 썼다. 1997년 이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였던 자살률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자살률 1위의 나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원격 의료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 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 총선 당선자 강연에서 원격 의료 검토 발언으로 포문을 열었다. 14일엔 정부에서 원격 의료에 대해 “적극 검토가 필요하다”(기획재정부 1차관), “활발히 진행되게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고 맞장구를 쳤고, 정세균 국무총리가 “보건의료대책의 과감한 중심이동이 필요하다”고 뒷받침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작심하고 원격 의료를 공론화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홍남기 부총리 주재 제1차 비상경제중대본 회의에서 ‘10대 산업분야 규제혁신방안’을 발표했었다. 그런데 10대 산업분야 중 3개가 의료 영리화 관련 내용이었다. ‘의료데이터 가명처리 활용으로 서비스 품질 제고’ ‘(인체)폐지방 재활용 허용’ ‘VR·AR 의료기기 품목 신설’ 방안이다. 지난 1월에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으로 내놓아 의료 영리화로 비판받았던 내용을 ‘코로나19 위기 대응’으로 포장지만 바꾼 데 불과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홍남기 부총리는 ‘위기를 기회로’ 삼자며 원격 의료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5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환자와 의료진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향후 예상되는 제2차 대유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비대면 의료 체계가 시급하다고 판단해 비대면 진료 체계를 추진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비대면이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비대면 의료’와 ‘원격 의료’를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관계자는 “지금 허용되고 있는 건 원격 의료가 아니라 비대면 의료”라며 “의료 영리화와는 상관없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정부 방침에 호응하고 나섰다. 원격 의료 반대 입장을 견지해 온 더불어민주당은 ‘비대면 진료’라는 용어를 앞세워 찬성론을 펴고 있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 국난극복위 대변인은 “여러 분야에서 비대면 경제와 비대면 산업이 일어날 텐데, 이에 대한 지원과 육성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유독 원격 의료 문제만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코로나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접목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남인순 최고위원도 “원격 의료 허용과 비대면 진료 활성화 논의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규제 완화와 의료 영리화 차원의 원격 의료 도입에 분명히 반대 의견을 견지해 왔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청와대 특별연설에서 “의료, 교육 등 비대면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정보 보호는 물론 의료와 교육의 공공성 확보라는 중요한 가치가 충분히 지켜질 수 있도록 조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정·청 모두 의료 영리화에 선을 긋지만, 의료 산업 육성과 개인정보 보호‧공공성 확보의 경계선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 관계자들은 원격 의료와 비대면 진료를 구분하고 ‘비대면’이라는 용어를 앞세우지만, 그들조차도 원격 의료와 비대면 진료의 차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원격 의료를 이명박 정부 때는 ‘의료 선진화’라고 했고, 박근혜 정부 때는 ‘창조경제’의 일환이라고 강변했었다. 포장지 바꾼다고 내용물이 달라지지 않듯이, 용어를 바꾼다고 하여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 용어를 바꾸고 다른 의미라고 강조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흔히 뭔가 떳떳치 못하고 뒤가 켕기는 경우에 말을 빙빙 돌리지 않은가.

의료법은 비대면 진료 상담·처방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월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면서 정부가 일시적으로 전화 진료를 허용했다. 상황이 급박하여 전화 진료라는 비대면 의료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집계한 코로나19 전화상담·처방 현황(2월24일~5월10일)에 따르면 총 26만2121건의 상담·처방이 이뤄졌다. 15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전화 진료는 지금까지 석 달 이상 운영되면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중요한 성과를 냈다. 환자에게 도움이 됐고, 의료진 안전에도 도움이 됐다. 특히 60살 이상 고령환자나, 고혈압, 당뇨 환자 등 코로나19 상황에서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병의원이 하고 있는 비대면 전화 진료는 코로나19 사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용인되는 한시적 조치다. 많은 사람들이 온전하지 못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으며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재난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허용된 비대면 진료를 제도적으로 허용해 일상화하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앞에서 보았듯이 전형적인 재난 자본주의의 쇼크 독트린 수법이다.

우리는 미국과 유럽 나라들의 공공의료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수많은 환자가 방치되고 무리죽음을 당하는 참상의 현실을 생생히 목격하였다.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데 속수무책인 시장 주도의 미국식 의료체계를 보고도 의료 관련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비대면 의료로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원격 의료의 본질이 감춰지진 않는다.

원격 의료의 제도화를 위해서는 국회에서 관련법이 제·개정되어야 한다. 벌써부터 올가을께 정부 여당이 원격 의료 도입을 위한 의료법 개정에 나설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4‧15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30일 21대 국회가 출범하면 단독입법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권한을 여당에게 위임한 주권자의 뜻이 과연 의료 영리화를 추진하고 원격 의료를 법제화하라는 것인가. (2020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