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조선'의 역사적 근원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오늘은 6·15 공동선언 20주년이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해방 뒤 처음으로 만나 채택한 공동선언은 남북관계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으로 대표되는 남북 교류와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한걸음씩 전진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개성공단에서 120여 남측 기업과 북측 노동자 5만여명이 함께 일했으며, 연인원 195만명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다. 이산가족 2만명이 상봉했고 44만명의 남북 왕래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남북관계는 냉각됐고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위기설이 끊이지 않았다. 촛불항쟁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여 남북관계의 복원과 획기적 개선에 합의하였다. 또한 정전상태로 서로 적대했던 조선과 미국이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통해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천명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이한 오늘 남북관계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6·15 20주년을 앞두고, 북측은 “남조선과 확실히 결별”할 뜻을 밝히며 ‘보복 행동’을 예고하는 담화를 냈다. 13일 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명의의 담화에서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며 군사 행동을 경고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 대해서도 ‘철거’를 예고했다. 김 제1부부장은 이런 조처들이 “(김정은) 위원장 동지와 당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권한”이며 “우리 내부의 국론”이라고 강조했다.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지난달 10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이 있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방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고, K방역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면서, “우리의 목표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따르고 싶었던 나라들이 우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가 표준이 되고 우리가 세계가 되었다”면서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자부심을 표현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는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위기를 가장 빠르게 극복한 나라, 세계의 모범이 되고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겠다”면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겠다”고 다짐했다.

한 달 새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실감한다. 나는 지난 5월 11일 칼럼 <‘이미 우리는 선진국’인가?>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방역을 잘한 것은 자부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헬 조선’의 현실을 외면한 채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남사스럽다는 요지의 비판이었다. 군사적 대결 국면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의 당면한 현실은 대한민국이 ‘이미 선진국’이라는 문 대통령의 언명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또 다른 측면에서 방증하고 있다.

북측의 ‘대적 군사 행동’ 경고와 남측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소집이 새삼 상기시켜주는 것은 우리가 정전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이다. 군사적 긴장감의 고조는 남과 북 사이에 없던 문제가 터진 것이 아니다. 망각하고 있던 냉엄한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일 따름이다.

1953년 7월 27일 한반도에서 포성을 멎게 한 것은 정전협정이다. 정전(停戰)은 ‘교전 쌍방 간에 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뜻한다. 종전을 합의하기 전에 군대끼리 전쟁을 잠시 멈춘다는 협정으로,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6‧25전쟁의 종전을 논의했으나 결렬됐고 단 한 차례 회담 뒤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여전히 중지 상태이며 아직도 종전이 아닌 상태다. 전후 두 세대가 흘렀지만 전쟁도 평화도 아닌 비정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3년 전쟁 끝에 67년간 정전이라는 세계사적으로도 지극히 예외적인 기막힌 현실이다.

정전으로 총성은 멈췄으되 종전이 아니므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가 정상적일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코로나19로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남북관계마저 틀어져 엎친 데 겹치는 상황이 되자, “갑자기 북은 왜 또 저래?”라고 불만일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없던 문제가 터진 것이 결코 아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언제든지 터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남과 북은 전쟁을 재개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기막힌 상황인 것이다.

정전체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중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전체제는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를 국시(國是)로 삼아 한국 사회를 전시 동원체제와 같은 총력안보체제로 재편하였다. 안보지상주의 아래서 국민은 안보를 위한 국가의 동원 대상이었고, 징병제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미화되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는 국가 안보의 후순위로 밀려났으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국민의 저항권은 전쟁의 재발 위협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준전시나 다름없는 정전체제 아래에서 민중의 삶이 정상적일 리 만무하다. 정전체제는 ‘전쟁 같은 삶’을 강요한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산율(2018년 0.98명, 2019년 0.92명)의 나라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생명이 태어나 자라기 어려운 불모지나 다름없다. 또한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다. 하루 34명, 연간 1만2463명이 자살로 죽는다.(2017년 기준) 산재 사망자가 하루 5.87명, 연간 2142명에 달한다.(2018년 기준) 전쟁 같은 삶이 낳은 ‘헬 조선’의 현실이다. ‘헬 조선’의 역사적 근원이 바로 정전체제임을 실증한다.

분단국가 대한민국은 반쪽 국가, 곧 반쪽 주권국가에 불과하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찢겨진 남북 분단은 온전한 독립과 진정한 주권 회복의 미완성을 뜻한다. 이승만 단독 정부는 일제를 대신한 미국 새 상전의 우산 속으로 다시 들어갔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형식적으로는 국민주권이 보장된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의 반쪽’의 주권 국가나 다름없다. 남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반쪽 주권 국가이며, 정치·경제·문화는 물론이고 군사주권마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반의 반쪽 주권 국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한 지 두 달 만인 2017년 7월,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취임 후 첫 외국 방문으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고 연이어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국무회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었다. 안타깝고 유감스럽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기 어렵다는 무력감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전쟁이 일시 정지된 정전체제 아래에서, 게다가 군사주권을 미국에게 위임한 상태에서는 우리 정부가 한미관계에서 자주적인 외교를 펴기 어렵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민주’ 정부지만 고작해야 ‘반의 반쪽의 민주’에 그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화를 통해 우선 대한민국이라도 선진화 해보자’는 반쪽 시각의 담론은 몽상 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꿈에 지나지 않다. 그것을 ‘헬 조선’의 현실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헬 조선’의 역사적 근원이 정전체제라는 것, 정전체제의 해체와 평화체제의 구축 없이 ‘헬 조선’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6·15 공동선언 20주년의 남북관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2020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