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남북이 전단 살포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탈북자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오는 25일을 전후해 대북 전단 100만장을 보낼 계획이다. 이에 맞서 북측은 대규모 ‘보복 삐라’ 살포 준비에 나섰다. 21일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는 “대남 보복 삐라 살포 투쟁은 그 어떤 합의나 원칙에 구속되거나 고려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똑같이 당해봐야 북측이 느끼는 혐오감과 불쾌감을 알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삐라’의 정식 명칭은 ‘심리전 전단지’다. 남과 북이 상대를 겨냥한 중요한 심리전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25억장, 조선인민군은 3억장의 삐라를 뿌린 것으로 추산한다. 전단 살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따른 남북조절위 공동발표문’,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제1장 이행 부속합의서’, 2004년 ‘6·4 합의서’ 등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중지키로 한 행위이다. 하지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등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북 전단을 살포해 왔다. 남북 당국이 주도하는 삐라 살포가 공식 중단된 것은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호비방 중단’에 합의하면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탈북자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를 부추기자 북측은 물리적 대응을 강력히 경고했고 2014년엔 삐라를 향해 발포하기도 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판문점선언’에서는 전단 살포를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전면 중지한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9·19 군사합의’)도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고 재차 확인했다.

청와대는 지난 11일 입장문을 통해, 북측은 ‘판문점선언’ 이후 대남 전단 살포를 중지했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남측은 지난해에 10차례, 올해 들어 3차례나 대북 전단을 뿌린 것으로 드러났다. 남측이 수차례 반복하여 합의를 위반한 것이다. 통일부도 대북 전단 살포는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인정했다.

뒤늦게 정부가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강하게 단속하겠다고 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대북 전단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남측의 합의 위반 행위에 대한 북측의 여러 차례 ‘경고’와 ‘권언’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이 지금껏 적극 대처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다가 뒤늦게 수선을 떨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뭐하고 있다가 이제야 뒷북을 치느냐?”고 비난을 받아도 문재인 정부로선 할 말이 없을 터다. 물론 북측이 대남 전단 살포로 맞대응하는 것도 우리 정서에 비추어 마뜩치 않고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기에 우려가 크다.

게다가 북측이 16일 오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다. 이로써 남과 북이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로 없이 사라져버렸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판문점선언’의 산물이며, 남북 당국자가 상주하는 사무소가 21개월 만에 무너져 내린 것은 이 선언의 파기를 상징한다. 남북관계가 4·27 이전 시대로 되돌아간 건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이다.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단에 군대를 배치할 것이며, ‘9·19 군사합의’에 따라 시범 철거한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GP)를 다시 복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서남해안 등 접경지 포병부대 증강 및 훈련 재개를 알렸다. ‘9·19 군사합의’가 파기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북측이 개성공단을 영구 폐쇄하고 군부대를 다시 배치하며, 금강산 관광 시설을 철거하고 군부대를 재배치하면 남북관계가 2000년 ‘6‧15선언’ 이전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남북관계가 20년 전으로 후퇴하고 있다.

가관인 것은 미국의 움직임이다. 미국은 그동안 온갖 대북제재로 남북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못하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방해해 왔던 장본인이다.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아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배후의 훼방꾼이자 조종자가 미국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내정 간섭 중단하고, 한미워킹그룹 해체하라”고 미국을 규탄하는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이즈음의 민심이다. 하지만 미국은 저간의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술 더 뜨고 있다.

그동안 한-미 군 당국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축소 조정해 진행했다. 특히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으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된 2018년 이후에 미 전략자산은 한반도와 인근 상공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올해 3월 예정됐던 전반기 한-미 연합지휘소연습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하지만 오는 8월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예정돼 있다. 한-미 국방장관은 이달 중 화상회의를 열어 후반기 연합훈련 방식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훈련이 재개될 경우 한반도 정세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됐던 2017년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최근 미국이 대표적 핵 전략 자산인 B-52H 전략 폭격기를 한반도 주변에 전개한 사실을 공개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각) 미 태평양 공군사령부는 누리집에 B-52H 두 대가 미 루이지애나 박스데일 공군기지에서 출발해 동해상에서 일본 항공자위대와 함께 장거리 호위 및 요격 훈련을 한 사실을 공개했다. B-52H 전략 폭격기가 동원된 사실을 미국 군 당국이 직접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9일에는 미 공군의 B-52H 두 대가 일본 열도 북쪽 상공을 비행하는 모습이 민간 항공 추적 사이트에 의해 포착되기도 했다. 전략자산을 전개하더라도 위치식별장치를 꺼서 민간 항공 추적 사이트에 노출되는 일을 막을 수 있는데도, 미국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미국의 의도가 무엇일까? 미국의 행태는 남과 북에 보란 듯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과 미국 일각에서 대북 군사강경책이 덩달아 나오고 있다. 남북관계가 대결로 치닫고 있는 때에 일본까지 가세시켜 군사적 긴장을 높여서 무엇을 얻자는 것인지, 미국의 속셈이야 빤하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려는 의도이고, 값비싼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술수이다. 우리 문제에 더 이상 간섭 말고 손 떼라고 했더니, 안하무인으로 무시하고 한 술 더 뜨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제 나라 국민의 생명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고 신경 쓸 겨를이 있는가? 전 세계는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에 맞서 방역에 총력전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233만1천명, 사망자가 12만2천명에 달한다.(21일 11시 기준) 전 세계 확진자 및 사망자의 4분의 1이 넘는다. 한국전에서 미군 전사자가 3만4천명, 베트남전에서 미군 전사자 5만8천명이었음을 상기하면 미국은 두 전쟁에 개입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까지 터져 항의시위가 폭발하고 미국 사회가 뒤숭숭하다. 이런 비상시국에 미국이 지금 남의 나라 일에 관여할 주제가 되는가?

미국의 국방비는 중국과 러시아 등 세계 2위부터 10위까지 다 합친 것보다도 많다. 미국의 국방비가 무려 1000조원에 달해 미국을 ‘천조국(千兆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 국방부의 국방비추계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 회계연도의 미국 군사비 총액은 7,244억달러이다.(한화로 환산하면 883조4천억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 요구한 2021 회계년도 연방정부 재량지출예산은 1만4,850억달러이다. 이 중 국방비가 9,890억달러(1,206조원)로 66.6%를 차지한다.

문제는 천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퍼부어대면 뭐하냐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속수무책인데. 미국은 ‘동맹국의 방위’ 운운하기 전에 자국민의 보호에나 우선 신경 쓰고, 첨단 무기 동원하는 무력시위에 쓸데없이 예산 낭비하지 말고 코로나19 방역에나 전념해야 할 것이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세계의 경찰’ 행세를 하면서 주접을 떤다는 말인가? (2020년 6월 22일)